제목: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본문: 요한복음 20장 1-18절

1.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요20:1)에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어두운데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여자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는 무서움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시체이지만 마리아는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꾸며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자신의 마음이 전혀 편안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분을 도무지 잊을 수 없고 죽은 그분의 몸이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새벽 일찍 아직 어두워서 무서움이 느껴질 수 있는 시간에 주님을 찾아갑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이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도저히 잊을 수 없어서, 그래서 그냥 앉아서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예수님이 없으면 웁니다

(요20:11)을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습니다. 시체가 없어졌는데 왜 울고 있습니까? 놀라야 되는 것 아닙니까?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인데,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녀에게는 보고 싶은 주님만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서 받은 사랑만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다시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사랑을 쏟고 싶은데 막상 그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기가 막히는 느낌을 가진 것 같습니다. 주님을 잃은 것도 가슴이 찢어지는데 그 분의 주검마저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제 힘이 없는 여성에게서는 눈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산 자들이 죽은 자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해 죄책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에게서 받은 그 큰 사랑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도리가 아닌데 하면서 말입니다.

울면서도 혹시 주님을 볼 수 있을까 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살펴봅니다.

정녕 마리아는 주님이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3.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이런 어린 아이처럼 되게 하였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어 삶이 피폐해지고 거친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과 이 땅의 비참한 모습에 대해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척박한 삶 가운데 마리아는 오히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부패하였는지를 확실하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처절하게 절망한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절대적으로 매료되고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막대한지를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부패를 아는 것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아는 것만큼 주님이 그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일만 달란트, 즉 6천만 데나리온 만큼 하나님께 죄지은 존재들 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거에만 머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자주 우울한 상태에서 남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생각날 때마다 울고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법이 없습니다. 그 분의 자녀를 그렇게 두지 않으십니다. 내 영혼이 마리아와 같은 그 자리에 있을 때, 주님만으로 갈급해 할 때 주님은 어김없이 가까이 오십니다.
이제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그 기쁨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큰 기쁨으로 형제자매에게 가서 자기가 만난 주님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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