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명의 성령의 법
본문: 로마서 8장 1-39절

1.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는 성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보장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생에게 들어온 원죄로 인해 마음이 부패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 인생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합니다(롬3:20).

선악과를 따먹고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죄로 왜곡된 자기가 주인이 된 모든 인생들은 이 땅의 욕망에 붙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기를 쓰고 땅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다 빼앗겨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천국의 백성의 존영으로 부르시는 것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소망도 없고 불가능한 상태의 인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서, (그 사랑으로, 그 은혜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유일한 살 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진실하게 믿게 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롬5:20)에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오해가, 난제가 발생하였습니다.

1. 이제 “율법으로는 안된다, 믿음에서 얻게 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된다”고 하니까 죄에 대해서 여유롭게, 안일하게 대하여도 상관없다는 식의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6장에서 그럴 수 없음을 상세하게 진술합니다.

2. 또 하나의 오해는 그러면 율법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7장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사도는 이렇게 두 가지의 난제에 대해서 충분히 다룬 후에 8장에서는 이미 5장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며 더욱 풍부하게 진술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완전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법”(롬3:27)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은혜의 통치” 내지 “은혜의 왕노릇”과 같은 말입니다.

첫사랑 때에는 회심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우리의 중심은 거기로 잘 회복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인생채찍과 사람막대기로 징계하시며) 우리의 삶을 은혜의 자리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이 은혜를 가로막는 주범은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율법 아래에 있으면 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롬8:2).

은혜의 통치아래에 있는 것의 반대는 율법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인데(출애굽기/레위기), 그 율법 아래에 있으면 망한다고 말합니다.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원죄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부패한 본성을 통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능력, 가능성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주님 오시기 1500년전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5:45-47)에서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은혜)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하며 이미 주님의 산상수훈의 중심을 보았습니다. “인생의 내면이 부패하여 도저히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가 없구나”를 고백하며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번제단을 바라볼 때 마다 그 마음은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고 낮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민12:3)까지 되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래서 성도는 무서운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벌거벗음과 위험과 칼의 죽음에 직면해서도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는 믿음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게 만족합니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계시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며,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여전히 간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조금도 마음에 흔들림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롬8:31-34).

이것은 어떤 종교적인 개념이나 인생의 확고한 신념이나 굳은 의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량의 믿음에서 역사하는 은혜에만 영혼의 만족과 평강이 있음을 알도록 생애를 통하여 연단하십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이지 다른 어떤 것도 그것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대속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 땅에서 모든 장자, 모든 인생들이 다 죽는데, 오직 예수님의 피가 그 심령의 문설주와 문인방에 뿌려진 자들만 삽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체험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신통방통한 영적 능력이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엄청난 지극정성을 드려서 되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대단한 업적과 성취를 한 것이 그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 보혈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하고 감격하는 은혜를 아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이 은혜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속량을 믿는 믿음에서 역사하는 은혜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성도는 의인이기에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어느 때든지 예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있는가를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시며,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주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며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을 붙들고 사는 성도에게 (롬8:35,38,39) 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눈물을 삼키고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녀들에게,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알아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만들어주시는 것을 목도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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