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III
본문: 로마서 11장 1-36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부인하게 만드십니다. 그가 이방인들처럼 전혀 성경에 대해, 교회에 대해 아무런 관계없이, 그러한 것에 전혀 관련이 없는 배경에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무서우리만치 하나님은 친 백성을 다 부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지금도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십자가 앞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6절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자질과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도를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다메섹 도정에서 주님의 강렬한 빛으로 고꾸라진 사도바울처럼 인생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삶의 바닥에서 계시해 주실 때 “지금까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 보이는 세상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실상은 그렇게 운행되는 것이 아니구나”를 알게 됩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초월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모든 순간 자기와 세상을 부인하여 진리에 거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놓으셨듯이 인생들의 의지 너머에서 하나님이 선하신 의지를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붙들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9장과 10장에서 보았듯이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과 은혜는 같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신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천국에만 관계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에 관계시키는, 사이비 믿음, 그렇게 믿음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을 아무데나 사용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천국을 믿으니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신뢰할 것이 손톱만큼도 없고 (가난한 마음입니다) 또 그러한 연약하고 비참한 처지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제사장들이 하루에 2번씩 번제를 드리듯이 애통하며 예배하여, 거기서 주시는 생수,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고 삽니다. 이것을 예수를 믿는 것,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날마다 성도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의 일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 인생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마저 행위의 방식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행위를 따라 살면 망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신앙도 조금 진척되면 금방 자랑하고 의로 삼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 누더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그다지도 미워하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마저도 자기에게 속으면서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을 놓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따라 살지 않고 행위를 따르는 미련함입니다. 인생은 선천적으로 자기의, 자기중심의 부패함에 익숙한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롬4장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믿음은 머리와 육신에서, 외모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쥐엄열매를 먹는 둘째 아들의 영혼에 임한 것처럼, 그의 영혼에 바람이 불어오듯이 천국의 아버지의 집에 가야 하겠다는 마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일대 지각변동일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에 본질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모든 것을 완전히 부인합니다. 그 둘째 아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천국의 우리 아버지 집에서 볼 때 이 세상의 포도주는 단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십자가 앞에 자기부인이라는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온 생애에 걸쳐서 이 믿음 안에서 날마다 예배하며, 거기에 약속된, 천국에서 주시는 은혜를 (생수를) 공급받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힘이요, 생명의 원천입니다. 성도가 들고 있는 등의 기름입니다. 이 기름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처절히 부인하는 십자가의 도가 세상의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
이 영혼의 영안을 하나님이 택한 자들에만 주셨습니다. 오직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하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받지 않는 자들은 이 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전2:14).
구원이 한편으로는 만세 전부터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열정적으로 전합니다. 세상의 논리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순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면서 기구하고 기막힌 사연들을 받아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받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온 인격을 다하여 받들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험한 십자가에 이끌립니다.
이 땅의 복지에 대부분의 마음이 뺏기게 하는 값싼 은혜, 값싼 구원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그 큰 고난의 피로 주신 이 귀한 생명을 그만그만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만그만하게 대하여주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행위를 따라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